857번 지방도로는 선암사에서 월등마을을 거쳐 보성강으로 이른다.
봄날 이 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이다. 3월 하순부터 색색의 꽃들이 길을 덮는다. 매화와 산수유 꽃이 피고 연이어 복숭아꽃과 살구꽃 자두꽃이 핀다. 노랑과 분홍 연둣빛 꽃들이 산골 마을을 포근히 감싸 준다. 꽃나무들의 구름에 안긴 마을의 모습은 엄마 품에 잠긴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산언덕 위에서 마을과 길들을 보고 있으면 히말라야 산록의 마을들을 보는 느낌이 있다.
봄날 이 길을 사랑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두 발로 걷는 일이다.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꽃과 산과 마을들 사이로 걸어간다. 좋았던 날들 생각이 절로 난다.
삶이란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의 부딪침 같은 것이다. 좋은 시간 속에 좋은 에너지가 깃들어 있고 좋지 못한 추억 속에 자신이 지닌 나쁜 에너지들이 숨 쉬고 있다.
신발을 벗는다. 맨발로 걸으면 길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체투지로 설산의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 사람이 아니라도 마음 안에 생의 또 다른 느낌이 다가온다.
인도의 한 대학촌에 머물 때 가슴을 설레게 했던 풍경이 있다. 브라만 여학생들 중 맨발로 학교에 오는 이들이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외제 승용차와 수영장을 지닌 이들이 풀밭 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느끼고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냄새와 꽃 냄새 봄 저수지 물 냄새를 맡으며 걷다 보면 문득 옛집 생각이 난다 길의 끝에 고향 옛집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곽재구 님 | 시인

곽재구 님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순천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합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84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