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사무소 지하에 탁구장이 있었다. 경비실에 열쇠를 구하러 갈 때마다 택배 찾으러 갈 때보다 열 배는 위축되었다. 당연한 입주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경비실까지 가서 “탁구장 열쇠 빌리러(혹은 가지러) 왔습니다.” 하고는 '탁구장 사용 장부'라는 공책에 동호수, 이름, 전화번호, 사용 예정 시간까지 적은 뒤 열쇠를 공손히 받아 쥐고 나오는 과정이 매우 불편했다.
감독관처럼 바라보고 계시니, 나는 공공기관에서 무슨 신청서 쓰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시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들아, 이 나이에 부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니?” 뭐가 어렵냐고 했던 아들도 경비실에 가는 것을 어려워했다. 열쇠 갖다 주기와 빌려오기를 걸고 탁구를 쳤을 정도로, 다 큰 나나 아직 어린 아들이나 경비실 가기를 저어했다.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서? 누구에게라도 부탁을 하면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비굴한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당당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나는 돈 대신 열패감을 지불했다. “너도 그런 거니?”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다른 집은 열쇠 빌리기 싫어서 탁구 안 치는 건가 보다.” “아빠, 나는 경비실이 교무실 같아.”
우리가 이사 가고 몇 달 뒤에, 지하실 이용에 관한 주민투표가 있었다고 한다. 거의 백 퍼센트로 이용자가 없는 탁구장 폐쇄가 결정되었다. 대신 주민독서카페가 생겼다고. 내 조잔한 마음 씀씀이를 변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용자를 어떤 식으로든 불편하게 하는 곳은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김종광 님 | 소설가
김종광 님은 1998년 문학동네에 단편 소설 〈경찰서여, 안녕〉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조선의 나그네 소년 장복이》, 《별의별》, 《왕자 이우》 등이 있습니다. 2000년에는 대산창작기금을, 2001년에는 신동엽창작상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