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만 남은 외가 마을에 갔습니다.
댐이 조성된 뒤 사람이 살지 않은 옛집 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고 오동꽃이 환합니다. 보라색의 종 모양을 한 이 꽃은 떨어질 때 툭툭 소리가 납니다. 어릴 적엔 이 꽃들을 실에 꿰어 꽃목걸이를 만들곤 했지요.
명절이면 우물가는 친척들이 모여 작은 장터가 되었습니다. 생선전을 부치고 감주와 한과를 차려 내던 이모들, 쉼 없이 두레박질을 하던 삼촌, 바쁘게 뛰어다니던 사촌 누이들과 멍멍이들로 우물가는 하루 종일 술렁였습니다. 그중, 내 마음 에 제일 많이 환한 얼굴은 할머니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우표 수집이 취미였습니다. 어느 날 서랍 속의 우표 책이 사라졌지요. 화를 내며 우는 내게 어머니는 그깟 헌 우표 몇 장 때문에 사내 녀석이 징징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책상 주위를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가, 이것이 우표냐?”
할머니가 들어 올린 것은 깨진 삼각자였습니다.
나는, “우표도 몰라 바보 같이!”라고 말하고서는 계속 울었지요.
민망해하던 할머니는 책상 뒤쪽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들고는 아주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요.
“아가, 이것이 우표지?”
할머니는 녹슨 컴퍼스를 집어 들고는 환히 웃었습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더 크게 울어 버렸지요. “아가, 이것이 우표지?”를 몇 번인가 반복하시던 할머니는 끝내 우표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밤 내내 할머니는 우표 책을 잃어버린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등을 도닥여 주며 말씀하셨지요.
“날 밝으면 또 찾아보고 못 찾으면 다음 장날 사 주마.”
아흔 평생 우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셨던 할머니. 식구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단 한 번 화도 내지 않고 웃으며 길 떠나신 할머니. 그 할머니가 기억의 사진틀 속에서 나를 보며 환히 웃습니다.
곽재구 님 | 시인
곽재구 님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순천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합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