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에는 예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꾸곤 했다. 이름도 묻지 못한 이별이 가슴 아파 새벽녘에 눈물을 글썽이며 잠에서 깨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꿈속의 소녀가 다시 찾아와도 곤란하지만 왠지 아쉽기는 하다.
요즘은 몇 가지 꿈을 돌아가면서 꾼다. 멀쩡하게 제대했는데 다시 훈련소로 끌려가거나, 비행기나 배를 타다 사고가 나거나, 꿈에 가 보았던 아름다운 산에 다시 찾아가거나, 삼십 년 전의 문구점을 찾아가는 꿈이다.
잠결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짓는 건 옛날 문구점을 찾아갔을 때다. 1980년대는 남자아이들에게 프라 모델(플라스틱 모델)의 시대였다. 수입 프라 모델의 반값도 안 되는 여러 가지 국산 프라 모델이 넘쳐났고 남자아이들은 열심히 돈을 모아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학교 앞 문구점 문을 열면 프라 모델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여 있다. 가진 돈은 적고 사고 싶은 건 많아서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다 보면 한두 시간이 휙 지나갔다.
문구점마다 파는 물건이 달라서 돈 없이도 자전거를 타고 여러 학교 앞을 즐겁게 돌아다녔다. 비행기, 전차, 총, 자동차, 오토바이, 군함, 보트 등 갖가지 프라 모델을 조립하며 남자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진짜 자동차와 비행기를 조종하는 날이 오길 꿈꾸었다.
문구점에서 삼백 원이었던 군인 모형이 대형 마트에서 오천 원이 되는 동안, 국민학생이던 나는 초등학생의 부모가 되었다. 프라 모델의 시대는 갔고 지금 아이들을 열광시키는 건 실물 모형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이다.
이제는 인사동의 장난감 박물관에 가야 오래된 프라 모델 상자들을 볼 수 있다. 낡고 해진 상자들을 보면 눈과 마음이 함께 따뜻해진다. 살아 있었느냐고, 우린 같이 나이 먹고 있다고 찬찬히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고 싶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옛날 프라 모델들이 잔뜩 쌓여 있을 것 같다. 팔리지 않는 프라 모델 상자와 함께 빛바래 가는 주인들, 용돈을 모아 달려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문구점 밖을 내다보는 노인들과 눈이 마주칠 것 같다.
그런 문구점이 어딘가에 꼭 있을 것 같아서 시골에 가면 옛 간판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김남중 님 | 동화 작가

김남중 님은 2004년 《기찻길 옆 동네》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자존심》으로 2006년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나는 바람이다1.2》, 《불량한 자전거 여행》, 《새나라의 어린이》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60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