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옷·밥·집)에는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도 살아남는 요소가 있다. 한복은 단순하고 편하게 개량되어도 여전히 한복이고, 즉석 음식이 아무리 판쳐도 직접 만드는 음식은 여전하며, 아파트에서 침대를 사용해도 굳이 바닥(온돌)을 데운다. 옷·밥·집에는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에 배인 유전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 먹거리 풍속 중에 말랭이가 있다. 말랭이는 보통 무말랭이를 이르지만 세어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지나물·호박꼬지·고사리·도라지·토란대·고구마 줄기·고춧잎·아주까리나물·취나물·시래기 등. 어디 그뿐인가. 고구마·감자도 말려서 조리하면 다른 맛이 나고 사과·감을 말리면 존득해진다. 말랭이는 그저 물기만 말리는 것이 아니라 물성을 바꾼다. 단순하지만 엄청난 변화 방식이다.
가을은 말랭이의 계절. 다람쥐 겨우살이 준비하듯 이것저것을 썰고 데치고 널어 말린다. 옥상에서도 말리고 마당이 모자라면 골목에서도 말린다. 소쿠리·광주리·채반, 돗자리는 예사고 신문지를 펴고 말리기도 한다. 어느 고층 아파트 발코니 창밖에 고추를 실로 엮어 매달아 말리는데 마치 붉은 꽃목걸이가 걸린 듯했다.
무엇을 말린다는 것은 미리 헤아린다는 뜻, 변하거나 상하지 않고 오래 가도록 채비하는 것이다. 물기가 머금던 대지의 양분과 햇빛과 바람이 전해 준 하늘의 기운이 스며 있는 말랭이는 물질을 초월한 시간의 알맹이다. 아 세상에 오래 사랑하고 기억할 일들은 물기를 빼야 할 일이다. 보라. 겨울이 오기 전에 나무들이 얼지 않으려 물기를 내리고 있음을.

이일훈 님 | 건축가

이일훈 님은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집'을 늘 고민합니다. '기찻길 옆 공부방', '밝맑도서관',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 등의 건축을 통해 주변과의 조화, 공동성의 실천, 친환경과 에너지 등의 관심사를 탐구했습니다. 글맛과 입담이 좋은 그는 《사물과 사람 사이》, 《제가 살고 싶은 집은》,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불편을 위하여》 등 다수의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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